개요
의도성(意圖性, Intentionality)은 철학에서 마음(mental state)이 어떤 대상, 속성, 상황 등을 가리키거나 대표하거나 대신 서는 힘 또는 성질을 뜻한다. 영어권 문헌에서는 'Intentionality', 독일어권에서는 'Intentionalität'로 표기하며 한국어에서는 '지향성(指向性)' 또는 '고의성(故意性)'으로도 번역된다. 의도성은 지각, 믿음, 욕망, 희망, 공포 등 다양한 정신 상태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많은 철학자가 이를 정신 현상의 표지(mark of the mental)로 간주해 왔다. 의도성 이론의 핵심 쟁점은 '의도적 비존재(intentional inexistence)' 문제, 즉 의도적 상태의 대상이 되는 실체의 존재론적 지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이다.[1][2][3]
역사·유래
중세 스콜라 철학과 안셀무스
의도성 개념의 기원은 중세 스콜라 철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존재론적 논증에서 '이해 속에 존재하는 대상'(in intellectu)과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in re)을 구별했다. 이 구별은 나중에 의도적 대상의 특이한 존재 양상을 논의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중세 스콜라 시대가 끝나면서 이 논의는 한동안 철학사에서 사라졌다.[2][3]
프란츠 브렌타노에 의한 부활 (1874)
19세기 후반,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가 저서 『경험적 관점에서 본 심리학』(Psychology from an Empirical Standpoint, 1874)에서 의도성 개념을 현대 철학에 재도입했다. 브렌타노는 의도성을 '모든 의식 행위의 특성'으로 정의하고, 이로써 '심리적(psychical)' 또는 '정신적(mental)' 현상을 '물리적(physical)' 또는 '자연적(natural)' 현상과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브렌타노에 따르면 모든 정신 현상은 중세 스콜라 학자들이 '의도적(또는 정신적) 비존재(intentional inexistence)'라고 부른 대상의 내재적 객관성(immanent objectivity)을 포함한다. 이는 대상을 향한 지향(direction toward an object), 내용에 대한 관계(reference to a content) 등으로 표현된다. 예컨대 표상(presentation)에서는 무언가가 표상되고, 판단(judgement)에서는 무언가가 긍정되거나 부정되며, 사랑(love)에서는 무언가가 사랑받고, 증오(hate)에서는 무언가가 미워지고, 욕망(desire)에서는 무언가가 욕망된다. 이 '의도적 내재성'은 정신 현상에만 고유하며, 어떤 물리 현상도 이와 유사한 것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 현상을 '자기 안에 대상을 의도적으로 포함하는 현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3]
브렌타노는 '의도적 비존재(intentional inexistence)'라는 표현을 써서 정신 현상 내용의 독특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리켰다. 일부 해석자(Jacquette 2004)는 'in-existence'의 'in-'을 처소격(locative)으로 읽어 '의도된 대상이 심리 상태 안에 존재한다'고 보지만, 다른 학자(Chrudzimski and Smith 2004)는 1874년 당시 브렌타노가 이 표현에 존재론적 함의를 담았는지 불분명하다고 신중론을 편다.[3]
에드문트 후설과 현상학적 전개
브렌타노의 제자이자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의도성 개념을 계승·확장하여 대륙 철학과 분석 철학 양쪽에서 널리 논의되게 했다. 후설은 의도성을 의식의 본질적 구조로 파악하고, 의식의 지향적 상관물(intentional correlate)로서의 노에마(noema)와 노에시스(noesis) 분석을 통해 의도적 행위의 다층적 구조를 해명하려 했다.[3]
20세기 주요 논쟁
*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존재와 무』에서 의도성을 의식 그 자체와 동일시했다.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의 의식'이므로 의식과 의도성은 구별되지 않는다.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에서 의도성을 '배려(Sorge)'로 재정의했다. 개인의 실존, 사실성, 세계-내-존재가 존재론적 의의를 갖는 조건으로서 배려를 제시하며, 단순한 '사물성(thinghood, ontic)'과 대비시켰다.
* 길버트 라일(Gilbert Ryle)과 A. J. 에이어(A. J. Ayer): 후설의 다층적 의식 구조와 의도성 개념을 비판했다. 라일은 지각이 과정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에이어는 지식 기술이 정신 과정 기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입장은 의식이 철저히 의도적이어서 정신 행위가 모든 내용에서 비워지고 순수 의식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사르트르도 의식을 '무'라고 불렀다).[3]
로데릭 치좀과 언어 분석적 부활
플라톤주의자 로데릭 치좀(Roderick Chisholm)은 언어 분석을 통해 브렌타노의 테제를 부활시켰다. 치좀은 브렌타노 개념의 존재론적 측면과 심리적 측면을 구별하고, 스콜라 철학 이래 의도성 기준의 적부(適否)를 정리하여 두 측면을 논리적 속성으로 규정했다. 치좀의 의도적 문장 사용 기준은 '존재 독립성(existence independence)', '진리값 무관심성(truth-value indifference)', '지시 불투명성(referential opacity)' 세 가지다.[3]
작동 방식과 유형
의도적 비존재 문제 (Problem of Intentional Inexistence)
의도성 이론의 중심 난제는 의도적 상태의 대상이 되는 실체의 존재론적 지위를 결정하는 '의도적 비존재 문제'다. 이는 마음이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향할 때 특히 두드러진다. 예컨대 메리(Mary)가 슈퍼맨(Superman)을 생각하고 있을 때, 슈퍼맨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메리의 생각은 분명히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이 모순을 해소하려 여러 이론이 제안되었으며, 크게 제거주의(eliminativism), 관계주의(relationalism), 부사주의(adverbialism)로 나뉜다.[3]
제거주의 (Eliminativism)
제거주의자는 위와 같은 문제적 정신 상태가 성립 불가능하다고 본다. 메리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의미 외재주의(semantic externalism) 형태에서 동기화될 수 있다. 의미나 사고 내용이 주체 외부 요인에 의해 결정되고, 성공적 지시가 의미의 조건이라면, 지시 실패는 의미 부재를 낳는다. 다만 '왜 메리에게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어렵다.[3]
관계주의 (Relationalism)
관계주의자는 의도적 상태를 주체와 의도적 대상 사이의 관계로 해석한다. 메리가 나무를 지각한다면 지각 관계는 주체(메리)와 대상(나무) 사이에 성립한다. 관계는 통상 '존재 함의적(existence-entailing)'이라, 관계 성립은 관계항(relata)의 존재를 함의한다. 이 원칙대로면 비존재 대상과의 관계는 성립 불가능하다.
해결책으로 두 갈래가 있다.
1. 원칙 부정(의도성 예외주의): 의도성은 다른 모든 관계와 달라서 존재 함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
2. 대리 대상(proxy/trace/ersatz object) 탐색: 실재하는 대상을 찾아 비존재 대상 역할을 대신하게 함.
* 추상 대상/플라톤적 이데아: 시공간 밖에 실재하는 추상 대상이나 이데아가 슈퍼맨에 대응한다고 봄.
* 구체적 정신 대상: 메리의 마음 안에 슈퍼맨에 대응하는 정신 대상이 존재하며, 메리는 이 정신 대상과 관계 맺는다고 봄.
* 가능 대상(possible object): 루이스(Lewis)류의 양상 실재론(modal realism)이나 야기사와 다카시(Takashi Yagisawa) 모델처럼 가능 세계에 실재하는 대상을 의도적 대상으로 삼음.
문제점: 메리가 슈퍼맨을 생각할 때 그녀는 시공간 밖의 이데아나 정신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 물리적 존재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험의 현상학을 왜곡한다는 비판이 따른다.[3]
부사주의 (Adverbialism)
부사주의자는 의도적 상태를 주체의 속성(property)으로 본다. 독립적 대상이 필요 없으므로 비존재 문제를 회피한다. 의도적 상태의 대상을 그 상태의 수식(modification)으로 보아 부사(adverb)로 언어적으로 표현한다. '메리가 슈퍼맨에 대해 생각한다' 대신 '메리가 슈퍼맨적으로 생각한다(thinks superman-ly)' 또는 '메리가 슈퍼맨 방식대로 생각한다(thinks in a superman-ly manner)'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비판: 자연언어와 그에 담긴 형이상학적 통찰에 부담을 주며, 의도적 대상을 상태의 단순 수식으로 환원함으로써 서로 다른 복합적 의도적 내용을 구별하는 힘을 잃는다(소위 '다속성 문제 many-property-problem').[3]
데닛의 이론 분류학 (Dennett's Taxonomy)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의도적 입장(The Intentional Stance)』 10장에서 현대 의도성 이론을 분류했다. 대부분 이론은 브렌타노의 '의도적 관용구의 비환원성' 테제를 수용한다. 여기서 다음 입장들이 갈린다.
1. 의도적 관용구는 과학에 문제적이다 → 치좀(1956), 앤스콤(G.E.M. Anscombe, 1957), 기치(Peter Geach, 1957), 테일러(Charles Taylor, 1964) 등. 의도적 대상에 대한 실재론을 유지하며, 어떤 형태의 이원론을 함의할 수 있음.
2. 의도적 관용구는 과학에 문제되지 않는다 → 자연과학과의 통일을 주장하며 세부 입장으로 나뉨.
* 제거적 유물론(Eliminative Materialism): 콰인(W.V. Quine, 1960), 처칠랜드(Churchland, 1981). '믿음', '욕망' 등 의도적 용어를 행동주의 언어(콰인)나 신경과학 언어(처칠랜드)로 대체 가능하다고 봄.
* 실재론(Realism): 포더(Jerry Fodor, 1975), 버지(Burge), 드레츠키(Dretske), 크립키(Kripke), 초기 퍼트남(Hilary Putnam). 번역과 믿음 귀속에 더 깊은 사실이 존재하며, 의도적 대상은 실재한다고 주장. 포더는 '사고 언어(language of thought)'로 실재론을 기초지으려 했으며, 데닛은 이를 '물리적으로 실현된 정신 표상의 구문론(syntax)에 근거시켜 물리과학에 수용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라고 평함.
* 콰인의 이중 기준(Quinean Double Standard): '존재론적으로는 의도적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의도적 언어는 필수불가결하다'는 입장. 콰인의 '근본적 번역의 불확정성(indeterminacy of radical translation)' 테제와 그 함의를 수용. 어떤 물리 시스템의 행동(언어 성향 포함)이 원칙적으로 두 가지 서로 다른 예측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고, 둘 다 믿음 귀속에서 동등하게 정당화됨을 의미. 실재론과 제거주의 사이의 중간 지대.[3]
자연주의 대 현상적 의도성 이론
현대 논쟁의 큰 축은 자연주의(naturalism)와 현상적 의도성 이론(phenomenal intentionality theory)의 대립이다. 자연주의는 의도적 속성이 자연과학이 연구하는 자연적 속성으로 환원 가능하다고 본다. 현상적 의도성 이론은 의도성이 의식(phenomenal consciousness)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2][3]
인공지능과 의미 추론
현대 인공지능 철학과 마음 철학에서 의도성은 의미 추론(semantic inference) 문제와 연결된다. 존 설(John Searle)은 '중국어 방(Chinese room)' 사고실험으로, 컴퓨터 내부의 어떤 구문론적 조작도 의미 내용(semantic content)을 부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자기조직화 오토마타 네트워크에서 출현하는 의도성이 주관적 성찰 경험과 객관적 행동 관찰을 결코 일치시킬 수 없으므로 영원히 불결정적(undecidable)일 것이라는 회의론도 존재한다.[3]
규제·논란·평가
의도성 개념의 모호성: 목적론(teleology) 개입 여부
의도성 논의에서 참여자들이 '의도성' 용어를 쓸 때 행위성(agency)이나 욕망(desire) 등 목적론적 개념을 함의하는지 여부를 명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데닛은 '의도적 입장'에서 명시적으로 목적론적 개념을 끌어오지만, 대다수 철학자는 목적론적 함의 없는 의미로 '의도성'을 쓴다. 예컨대 의자에 대한 생각은 의자에 대한 어떤 의도(intention)나 믿음도 함의하지 않은 채 의자에 관한 것일 수 있다. 언어 철학자에게 의도성은 주로 기호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귀착된다. 이 불명확성이 여러 견해 차이의 저변에 깔려 있다.[3]
후설의 다층 의식 구조에 대한 비판
라일과 에이어는 후설의 의도성 개념과 다층 의식 구조를 비판했다. 라일은 지각을 과정으로 보지 않았고, 에이어는 지식 기술이 정신 과정 기술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 결과 의식이 철저히 의도적이 되어 정신 행위가 내용에서 비워지고 순수 의식이 '무'가 된다는 극단적 결론에 이른다. 사르트르 역시 의식을 '무'로 지칭했다.[3]
자연주의적 환원 가능성 논쟁
의도적 속성이 자연적 속성으로 환원 가능한지(자연주의) 아니면 의식에 기초하는지(현상적 의도성 이론)는 현재도 살아 있는 논쟁이다. 이 대립은 마음 철학과 언어 철학의 핵심 쟁점 중 하나로 남아 있다.[2][3]
인공지능의 의미 이해 가능성
설의 중국어 방 논증과 자기조직화 시스템의 불결정성 주장 사이에서, 인공 시스템이 진정한 의도성(의미 이해)을 가질 수 있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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