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남북정상회담(南北頂上會談, 문화어: 북남수뇌상봉)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가 직접 만나 한반도 평화, 통일, 경제협력 등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정상회담이다.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양국 정상이 마주 앉은 것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 회담이 처음이다. 이후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의 평양 회담,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평양 회담 등 총 다섯 차례 성사되었다. 회담 장소는 평양 세 차례, 판문점 두 차례였으며, 각 회담은 6·15 남북 공동선언, 10·4 남북정상선언, 판문점 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등 합의문을 남겼다[1][2][3].
역사·유래
초기 구상과 무산 (1970~1990년대)
정상회담 개념은 1971년 8월 김일성이 박정희 대통령 비판 속에서도 남측 인사 접촉 의사를 밝히면서 남북적십자회담과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이어졌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방북 등 특사 교환을 통해 정상회담이 논의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2].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김일성 서울 초청과 상호 방문을 제안했고, 임창영 전 유엔대사 등 밀사를 통한 물밑 접촉이 이어졌으나 1983년 아웅산 묘역 테러, 1985년 무장간첩선 격침 사건 등으로 결렬되었다[2]. 노태우 정부 들어 1988년 8·15 경축사에서 정상회담을 제의하고 김일성도 평양 개최 의사를 비쳤으나, 의제 합의 실패와 군부·보수층 저항으로 끝내 불발되었다[2]. 김영삼 정부 시절 1994년 7월 25~27일 평양 회담이 합의되었으나, 7월 8일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되었다[2][3].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김대중-김정일)
김대중 정부 출범 후 햇볕정책 기조 아래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첫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정일이 공항 트랩 아래까지 마중 나와 조선인민군 의장대 사열을 거행하는 등 파격적 예우가 이뤄졌다. 회담 결과 6·15 남북 공동선언이 채택되어 전쟁 포기, 통일 문제 대화 해결, 이산가족 상봉, 경제협력 등 원칙이 합의되었다. G8,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유엔 총회 등에서 한반도 평화 지지 결의가 잇따랐다. 그러나 회담 직후 당국 간 회담 결렬, 대북송금 특검 논란,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 출범에 따른 대북 강경책 등으로 남북 관계 진전은 정체되었다. 여론조사상 통일 필요성 인식도 2000년 8월 71.2%에서 12월 48.6%로 급락했다[2][3].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노무현-김정일)
노무현 정부 초반 제2연평해전, 이라크 전쟁 등 여파로 남북 관계가 냉각되었으나, 2004년 개성공단 착공, 2005년 정동영 통일부장관 방북 등을 계기로 해빙 무드가 조성되었다. 2006년 북한 미사일 발사·핵실험 위기 속 비밀 추진도 무산되었으나, 2007년 8월 28일 개최 합의 발표 후 수해로 35일 연기되어 10월 2~4일 평양에서 열렸다. 10·4 남북정상선언에서는 종전선언·평화협정 추진, 남북공동어로구역 설정, 개성공단·철도·항만 등 경제협력 확대, 장관급회담의 총리급 격상, 정상 수시 회동 합의 등이 담겼다. 북방한계선(NLL) 의제 제외, 납북자·국군포로 논의 부재, 10조 원 이상 소요 재원 마련 불투명 등 비판도 제기되었다[2][3].
2018년 세 차례 정상회담 (문재인-김정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2017년 베를린 구상, 2018년 김정은 신년사 화답으로 대화 국면이 열렸다. 2월 김여정 등 북한 특사단 방남, 3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 특사단 방북을 거쳐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제1차 회담, 판문점 선언 채택. 5월 26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제2차 회담(비공개, 2시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직전 남북 정상이 직접 이견 조율. 9월 18~20일 평양에서 제3차 회담(2박 3일), 9월 평양공동선언 채택. 문재인 대통령은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북한 주민 대상 연설, 김정은 위원장 비핵화 육성 천명, 종전선언 가능성 개방, 남북공동군사위원회 구성 합의, 경제·산림·보건·이산가족·국제경기 공동 진출 등 포괄적 합의 이뤄짐[2][3].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부 시기
이명박 정부는 정상회담 정례화·상주대표부 설치 제안했으나 '형식적 회담 거부', 10·4 선언 핵심 과제 배제, 금강산 피격 사망, 천안함·연평도 도발 등으로 관계 경색.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 방남, 2011년 비밀 접촉 폭로(돈 봉투 의혹), 2012년 총선 겨냥 회담 제의 폭로 등으로 신뢰 훼손[2]. 박근혜 정부는 공식 라인 일원화 천명했으나 2007년 회담 대화록 논란, 2014년 아시안게임 계기 고위급 접촉 불발, 2016년 4차 핵실험·개성공단 폐쇄로 관계 단절[2]. 윤석열 정부 들어 특사 활동 등 별도 진전 사항은 자료에 나타나지 않음[2].
작동 방식과 유형
특사 교환과 물밑 접촉
남북정상회담 성사 과정 전반에 걸쳐 특사 교환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961년 황태성 파견, 1971년 이후락 방북, 1985~1991년 박철언 42차례 비밀회담, 김대중 정부 박지원·임동원, 노무현 정부 김만복 국정원장, 문재인 정부 서훈 국정원장 등 정보기관 수장이 주로 특사로 활약했다. 직무상 기밀 유지 용이성과 공식 채널 단절 상황에서의 특수성 때문으로 분석된다[2].
공개·비공개 병행
2000·2007·2018년 9월 회담은 사전 공개·공식 일정으로 진행되었으나, 2018년 5월 26일 판문점 통일각 회담은 사전 예고 없이 비공개로 2시간 진행되는 등 상황 긴급성에 따라 유연하게 운영되었다[3].
합의문 도출 유형
각 회담은 공동선언·공동성명·평양공동선언 등 문서화된 합의를 남겼다. 6·15 선언(원칙적 평화·통일 방향), 10·4 선언(구체적 이행·경협·군사신뢰), 판문점 선언(비핵화·평화체제·교류확대), 9월 평양공동선언(비핵화 구체화·군사분야 합의서·경협·인도적 문제) 등 단계적 심화 양상[2][3].
특사 활동의 역사적 역할
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 특사 교환은 필수적 매개였다. 냉전기 밀사 성격에서 출발해 1971년 이후락 방북(7·4 성명), 1985~1991년 박철언 42차례 회담(기본합의서), 김대중 정부 박지원·임동원(1차 회담), 노무현 정부 김만복(2차 회담, 법적 최초 대북특사), 문재인 정부 서훈(3~5차 회담) 등 정보기관 수장 중심 특사 외교가 작동. 2018년 김여정·정의용 특사단 공개 파견, 정상 간 핫라인 개설로 특사 역할 변화·축소 가능성 대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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