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지도 제작자(cartographer)는 지리적 지도를 작성하는 전문직이자 직위이다. 지도학(cartography)의 실천 주체로서, 현실 또는 상상의 현실을 공간 정보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모델링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전통적인 지도학의 근본 목적은 지도의 의제를 설정하고 지도화할 대상의 속성을 선택하는 지도 편집, 피지도 대상의 지형을 평면 매체에 표현하는 지도 투영법, 지도 목적과 무관한 특성을 제거하는 일반화, 표현할 특성의 복잡성을 줄이는 일반화, 지도 요소를 배열하여 의도한 메시지를 청중에게 가장 잘 전달하는 지도 설계 등으로 요약된다. 현대 지도학은 지리 정보 시스템(GIS)과 지리 정보 과학(GISc)의 이론적·실천적 토대를 다수 구성한다.[2]
역사·유래
고대
가장 이른 시기의 지도가 무엇인지는 '지도'라는 용어 정의가 명확하지 않고, 지도일 법한 유물이 실제로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논쟁 대상이다. 아나톨리아 고대 도시 차탈회위크(Çatalhöyük)를 그린 것으로 보이는 벽화는 기원전 7천년 말기로 연대 측정되었다. 프랑스 브고산(Mount Bego)과 이탈리아 발카모니카(Valcamonica)의 선사 시대 바위 조각(기원전 4천년기) 중 점 찍힌 직사각형과 선으로 된 기하학적 무늬는 경작지를 묘사한 것으로 널리 해석된다. 기타 고대 세계 지도로는 미노아 문명 '제독의 집' 벽화(기원전 1600년경, 비스듬한 시점의 해변 공동체), 카시트 시대(기원전 14~12세기) 바빌론 성도 니푸르의 조각 지도, 기원전 9세기 바빌로니아 세계 지도(바빌론을 유프라테스강에 두고 아시리아·우라르투·여러 도시가 둘러싸고, 그 바깥을 '쓴 강' 즉 오케아노스가 에워싼 형태, 또 다른 지도에서는 바빌론이 세계 중심 북쪽에 위치) 등이 현존한다.[2]
고대 그리스·로마는 기원전 6세기 아낙시만드로스 시대부터 지도를 제작했다. 기원후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는 지도학 논저 『지리학(Geographia)』을 저술했는데, 여기에는 서양 사회가 알던 세계(에쿠메네)를 그린 프톨레마이오스 세계 지도가 들어 있다. 8세기경 아랍 학자들이 그리스 지리학자 저작을 아랍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도로가 로마 세계에서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도로를 따라 경험되는 세계를 그린 여정기(itinerarium) 형태의 지도가 만들어졌으며, 『포이팅거 지도(Tabula Peutingeriana)』만이 현존한다.[2]
고대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지리 문헌이 나타난다. 현존 최고(最古) 중국 지도는 전국 시대(기원전 4세기) 진나라 것이다. 중국 과학자 소송(Su Song)이 1092년 간행한 『신이상법요(新儀象法要)』에는 정거 원통 투영법으로 그린 성도(星圖)가 실려 있다. 이 방식이 소송 이전에도 중국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소송의 성도가 인쇄 형태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별지도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인도의 초기 지도 제작 형태는 북극성과 주변 별자리를 그린 것으로, 항해에 쓰였을 수 있다.[2]
중세와 르네상스
맵파 문디(Mappae mundi, '세계 지도')는 중세 유럽의 세계 지도다. 약 1,100점이 현존하며, 이 중 900여 점은 필사본 삽화로, 나머지는 독립 문서로 남아 있다.[2]
아랍 지리학자 무함마드 알이드리시(Muhammad al-Idrisi)는 1154년 중세 아틀라스 『로저의 책(Tabula Rogeriana)』을 제작했다. 아프리카·인도양·유럽·극동(아랍 상인·탐험가 기록으로 습득)과 고전 지리학자 유산을 결합해 수많은 나라를 상세히 기술했다. 방대한 텍스트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세계관에 여러 아랍 지리학자 영향을 더한 세계 지도를 만들었으며, 3세기 동안 가장 정확한 세계 지도로 통했다. 지도는 7개 기후대로 나뉘고 각 기후대 설명이 상세하다. 남쪽을 위쪽에 두고 아라비아를 중심에 둔 작은 원형 지도도 제작했다. 알이드리시는 지구 둘레를 추정했는데, 실제 값과 10% 이내 오차였다.[2]
대항해 시대(15~17세기) 유럽 지도 제작자들은 수세기 동안 전해진 옛 지도를 모방하는 한편, 탐험가 관측과 새로운 측량 기술을 바탕으로 독자 지도를 그렸다. 나침반·망원경·육분의 발명으로 정확도가 높아졌다. 1492년 독일 지도 제작자 마르틴 베하임(Martin Behaim)이 포르투갈 주앙 2세 고문 자격으로 현존 최고 지구본을 만들었다. 1507년 마르틴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가 지구본 세계 지도와 12면 대형 세계 벽지도 『우니베르살리스 코스모그라피아(Universalis Cosmographia)』를 제작했는데, 여기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최초로 쓰였다. 포르투갈 지도 제작자 디오구 리베로(Diogo Ribero)가 1527년 졸업된 적도를 가진 최초의 플라니스피어(planisphere)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지도 제작자 바티스타 아녜세(Battista Agnese)는 해도(海圖) 필사본 아틀라스를 최소 71종 제작했다. 요하네스 베르너(Johannes Werner)가 베르너 투영법(정적도 심장형 투영법, 코르디포름 투영법)을 개량·보급했으며, 16~17세기 쓰였다. 이후 정현 투영법(sinusoidal projection)과 본 투영법(Bonne projection) 등 변형이 나타났는데, 베르너 투영법은 표준 평행을 북극에, 정현 투영법은 적도에, 본 투영법은 그 중간에 둔다.[2]
1569년 지도 제작자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가 메르카토르 투영법 기반 지도를 처음 출판했다. 경도선은 등간격 평행 수직선, 위도선은 적도에서 멀어질수록 간격이 벌어지는 평행선으로 그려, 일정 방위 항로가 직선으로 표현되어 항해에 편리하다. 같은 속성 탓에 적도에서 멀수록 실제보다 면적이 커 보여 범용 세계 지도로는 한계가 있다. 메르카토르는 지도 모음집을 뜻하는 '아틀라스(atlas)'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으로도 꼽힌다. 말년에 『아틀라스』를 구상해 세계 여러 지역 지도와 신의 천지 창조부터 1568년까지 연대기를 담으려 했으나 생전 완성하지 못했고, 사후 증보·재간행되었다.[2]
1570년 브라반트 지도 제작자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가 질리스 호프트만(Gillis Hooftman) 권유로 최초의 진정한 근대 아틀라스 『세계의 극장(Theatrum Orbis Terrarum)』을 만들었다. 드물게 기여 지도 제작자 183명(1603년 기준)을 명기했다.[2]
르네상스기에는 지도가 관람자를 감동시키고 소유자의 세련됨·교양·세계성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에 르네상스 말기에는 지도 회화·조각 등 예술품과 동등한 중요도로 전시되었다. 16세기 인쇄술 보급으로 지도가 소비자에게 널리 유통되어, 1500년대 말 베네치아 가정 약 10%가 어떤 형태든 지도를 소장했다. 르네상스 지도 3대 기능은 세계 일반 기술, 항해·길찾기, 토지 측량·재산 관리였다. 중세에는 목적지 도달법이 문자로 적히는 편이 많았으나, 르네상스 들어 지도 제작이 권력의 은유로 인식되었다. 정치 지도자는 지도를 통해 영유권을 주장했고, 유럽의 종교·식민 확장이 이를 뒷받침했다. 성지 등 종교 장소가 가장 많이 지도화되었다. 1400년대 말~1500년대 말 로마·피렌체·베네치아가 지도 제작·무역을 주도했다. 피렌체(1400년대 중후반)서 시작해 로마·베네치아로 이동했다가, 16세기 말 아틀라스 제작자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베네치아 지도 출판은 인문학·서적 출판과 연계되어 단순 정보 제공을 넘어섰다.[2]
#### 인쇄 기술
르네상스기 두 주요 판화 기술은 목판화(woodcut)와 동판 요철판화(copper-plate intaglio)다. 목판화는 중질 경재에 부조로 지도 이미지를 새겨 잉크 칠 후 종이에 누른다. 돌출된 선이 종이 뒷면에 요철로 남는다. 장점은 프레스 없이 탁본 가능, 기존 프레스 활용 가능, 목판 내구성 양호 등이다. 단점은 세밀 표현 어려움, 선 불균일성이 요철판화보다 두드러짐, 반복 사용 시 선이 흐려지고 잉크·종이 차이로 동일 복제 어려움 등이다. 15세기 후반 정밀 끌을 써서 목판 품질을 높이는 장인 기법이 발달했다.[2]
요철판화는 가공하기 쉬운 금속(주로 구리, 때로 황동)에 선을 새긴다. 조각가는 얇은 왁스를 펴 바르고 먹으로 세부를 그린 뒤, 스타일러스로 선을 따라 금속판에 에칭한다. 스타일러스로 그린 선을 따라 구멍을 뚫고 분필로 선을 옮긴 뒤 조각하기도 한다. 같은 방향 선을 한꺼번에 파고 판을 돌려 다른 방향 선을 판다. 완성판에 잉크를 바르고 닦아 에칭된 홈에만 잉크가 남게 한 뒤, 강하게 눌러 종이에 전사한다. 압력이 강해 판 테두리 둘레에 '판 자국(plate mark)'이 생기고 종이가 안쪽으로 눌린다. 구리 등 금속이 비싸 판을 재활용하거나 녹여 다른 용도로 썼다.[2]
목판화든 요철판화든 인쇄 후 말리고, 다시 프레스에 넣어 종이를 평평하게 편다. 당시 구할 수 있는 종이면 무엇이든 썼으나 두꺼운 종이가 내구성 좋았다. 15세기 말에는 부조·요철판화 비중이 비슷해졌다.[2]
#### 문자 조각
지도 제작에서 문자 조각(lettering)은 정보 표기에 필수다. 목판화에서는 세밀한 글자 조각이 어려워 네모지고 각진 글자가 되기 쉬웠는데,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양식화된 둥근 필기체와 달랐다. 품질 향상을 위해 정밀 끌을 개발해 부조를 팠다. 요철판화는 거친 매체 문제가 없어 루핑 서체(cancellaresca) 같은 흘림체를 구현할 수 있었다. 자유 필체 조각 외에 맞춤형 역방향 펀치도 금속 조각에 쓰였다.[2]
#### 색채
지도 제작에서 색채 최초 사용 이유를 단정하기 어렵다. 정보 표시용으로 시작해 미적 요소가 뒤따랐다는 견해와, 미적 목적에서 시작해 정보 전달로 발전했다는 견해가 공존한다. 르네상스 많은 지도는 미색 상태로 출간되었으며, 이는 1800년대까지 이어졌다. 다만 출판사는 후원자 주문에 따라 지도나 아틀라스에 채색해 주었다. 모든 채색은 수작업이어서, 후원자는 단순·저렴한 채색부터 은·금박 호화 채색까지 지정할 수 있었다. 가장 단순한 채색은 국경·강 외곽선만 칠하는 것이었다. 워시 채색(wash color)은 잉크나 수채로 구역을 칠하는 것, 림닝(limning)은 은·금박으로 문자·문장·장식 요소를 밝히는 것이었다.[2]
근세 초기
근세 초기에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지도 제작 기술이 수렴하고 인도양을 매개로 상업 지도 기술이 교류되었다. 17세기 초 중국 지도 제작자가 만든 셀든 지도(Selden Map)는 1620년경 제작으로 추정되나 논쟁이 있다. 이 지도는 '동아시아인은 유럽인 도착 전까지 지도 제작을 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오해와 대조되며, 교역로·나침반 장미·척도 막대 표현이 중국 상업 지도 제작 기술의 집대성을 보여준다.[2]
1689년 러시아 차르 대표와 청나라 대표가 시베리아 동부 국경 분쟁지 인근 네르친스크(Nerchinsk)에서 만났다. 청측 협상단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재자로 참여해 아무르강(헤이룽장)을 국경으로 정하고 양국 교역 관계를 여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다. 이 조의 의의는 양측 상호작용과 다국적 중재자 개입에 있다.[2]
계몽주의 시대
계몽주의 시대 지도들은 실질적으로 모두 동판 요철판화를 썼으며, 취약하고 거친 목판화를 버렸다. 지도 투영법 활용이 진화해 양반구 투영법(double hemisphere)이 널리 쓰였고, 메르카토르의 권위 있는 항해용 투영법이 점차 더 많이 등장했다. 당시 정보 부족과 측량의 극심한 어려움 때문에 지도 제작자들은... [자료 중단]
작동 방식과 유형
지도 제작자의 작업은 전통적 지도학의 다섯 근본 목적에 따라 구조화된다. 첫째, 지도의 의제를 설정하고 피지도 대상 속성(도로·육지 등 물리적 속성, 지명·정치 경계 등 추상적 속성)을 선택하는 지도 편집(map editing)이다. 둘째, 피지도 대상 지형을 평면 매체에 표현하는 지도 투영법(map projections)이다. 셋째, 지도 목적과 무관한 피지도 대상 특성을 제거하는 일반화(generalization)이다. 넷째, 표현할 특성의 복잡성을 줄이는 것 역시 일반화에 속한다. 다섯째, 지도 요소를 배열해 의도한 메시지를 청중에게 가장 잘 전달하는 지도 설계(map design)이다. 현대에는 이 과정이 지리 정보 시스템(GIS)과 지리 정보 과학(GISc) 이론·실천 기반과 결합되어 수행된다.[2]
인쇄 기술 측면에서는 부조 인쇄(목판화)와 요철 인쇄(동판화)가 병용되었고, 문자 조각에서는 부조용 정밀 끌과 요철판용 자유 필체·역방향 펀치 기법이 발달했다. 채색은 수작업으로 외곽선·워시·림닝 등 단계별로 적용되었다.[2]
규제·논란·평가
자료에는 지도 제작자 직업 자체에 대한 직접적 규제·논란·평가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지도 제작이 정치적 권력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르네상스기 영유권 주장, 종교·식민 확장과의 연계), 지도 정확도와 투영법 선택에 따른 왜곡 문제(메르카토르 투영법의 고위도 면적 과대 표현), 채색·인쇄 기술 차이에 따른 품질·복제성 편차, 동아시아 지도 제작사 왜곡(셀든 지도 발견 이전 '유럽인 도착 전 동아시아 무지도론' 통용) 등이 간접적 논란·평가 거리로 언급된다.[2]
이 문서는 GGWiki AI가 공개 자료(아래 출처)를 조사해 새로 쓴 초안입니다. 틀린 내용은 편집하거나 이의 제기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