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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째 줄 근처
추가: ## 개요
추가: 시티 월(City walls)은 도시, 마을 또는 기타 정착지를 잠재적 침략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방어용 성벽을 뜻한다. 단순한 목책이나 토성에서부터 탑, 포대, 성문 등을 갖춘 대규모 군사 요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띠며,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착지를 둘러싸는 용도로 널리 쓰였다. 일반적으로 도시 성벽(city walls) 또는 읍성(town walls)이라고 부르나, 중국의 만리장성, 베닌의 성벽, 하드리아누스 성벽, 아나스타시우스 성벽, 대서양 방벽처럼 도시 경계를 훨씬 넘어 지역을 에워싸거나 영토 경계를 표시하는 용도로 축조된 경우도 존재한다. 산악 지형에서는 레치(Letzi) 같은 방어벽이 성과 결합되어 계곡을 봉쇄하는 데 활용되기도 했다. 순수한 방어 기능 외에도 성벽은 이를 둘러싼 공동체의 지위와 독립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식 구실을 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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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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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메소포타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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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초기 역사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성벽은 거의 모든 도시의 필수 요소였다. 고대 수메르의 우루크(Uruk)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벽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그보다 앞선 시기인 기원전 8천 년경에는 서안 지구의 예리코(Jericho) 원시 도시에 성벽이 둘러져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읍성으로는 기원전 6천~5천 년경 축조된 솔니차타(Solnitsata)의 성벽이 알려져 있다. 아시리아인들은 궁전, 신전, 방어벽을 짓기 위해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했다. 바빌론은 느부갓네살의 건축 사업으로 성벽이 확장되고 이슈타르 문이 세워지면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카스피해 양쪽에 데르벤트 성벽과 고르간 대성벽을 축조해 유목민의 침입에 대비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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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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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인더스 문명의 일부 정착지도 요새화되어 있었다. 기원전 3500년경 인더스 범람원에는 수백 개의 소규모 농경 마을이 산재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방어 시설과 계획된 도로를 갖추고 있었다. 코트 디지(Kot Diji)의 석조·진흙 벽돌 가옥들은 거대한 석제 홍수 제방과 방어벽 뒤에 밀집해 있었는데, 이는 인근 공동체 간에 비옥한 농지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 아프가니스탄 남동부의 문디가크(Mundigak, 기원전 2500년경)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만든 방형 포대를 갖춘 방어벽이 존재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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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동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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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도시를 완전히 에워싸는 성벽 개념은 유럽인의 도래 전까지 동남아시아에서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으나, 버마는 예외적으로 1566년경부터 성벽 도시 전통을 이어왔다. 1755년 랑군(Rangoon)에는 지면 토대 위에 티크 통나무를 세운 주둔책(stockade)이 설치되었고, 여섯 개의 성문마다 거대한 벽돌 탑이 양옆을 지켰다. 16~17세기 들어 동남아시아 도시가 급성장하고 유럽 해군의 공격에 대비할 필요가 생기면서 성벽 축조가 확산되었다. 아유타야(Ayutthaya)는 1550년에, 반텐(Banten)·제파라(Jepara)·투반(Tuban)·수라바야(Surabaya)는 1600년까지, 마카사르(Makassar)는 1634년까지 각각 성벽을 갖췄다. 겔겔(Gelgel)의 주 방어선은 해안 성벽이었다. 성벽이 없는 도시라도 최소한 왕성이나 귀족 구역을 둘러싼 목책 요새(citadel)는 갖추고 있었는데, 수라카르타(Surakarta)와 아체(Aceh)가 그 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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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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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상나라(기원전 1600~1050년) 이래 중국에서는 대규모 판축 토성이 축조되었다. 고대 아오(Ao) 수도에는 거대한 판축 성벽이 세워졌다. 전국시대(기원전 481~221년)에는 석성도 나타났으나, 본격적인 석조 건축으로의 전환은 당나라(618~907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진나라(기원전 221~207년) 이전에 이미 만리장성의 여러 구간이 축조되었고, 진나라 때 연결·보강되었으며, 현재의 형태는 주로 명나라(1368~1644년)의 공학적 성과로 완성되었다. 핑야오(Pingyao)의 대성벽과 베이징 자금성의 성벽(영락제 초기에 축조)은 대표적 사례다. 토니오 안드라데(Tonio Andrade)에 따르면 중국 성벽의 엄청난 두께 때문에 더 큰 대포 개발이 억제되었으며, 산업 시대 포병조차 중국 성벽을 돌파하기 어려웠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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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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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한국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군사·행정 기능을 겸한 읍성(邑城)이 축조되었다. 조선 시대 내내 읍성은 수리·개축되거나 새로 지어졌으나, 1910년 일본(당시 한국의 점령 세력)이 철거령을 내리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 일부 유적지에서 발굴 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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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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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미케네 그리스의 미케네 유적처럼 거대한 석벽(키클로페안 벽)이 축조되었다. 고전기 아테네는 피레아스(Piraeus) 군항까지 이어지는 장성(Long Walls)을 쌓았다. 스파르타와 로마는 오랫동안 성벽 없이 군대만으로 방어를 맡았다. 초기에는 목재와 흙으로 간단히 쌓았다가 나중에는 모르타르 없이 돌을 쌓아 올리는 혼합 구조로 발전했다. 로마는 모르타르로 결합한 거대한 석벽으로 도시를 방어했는데,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과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으며, 트리어의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나 링컨의 뉴포트 아치(Newport Arch) 같은 성문 유구도 전해진다. 중부 유럽에서는 켈트족이 로마인이 오피다(opida)라고 부른 대형 요새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그 성벽은 지중해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초기 중세에는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가 드물게 단순한 석벽으로, 더 흔하게는 벽과 해자를 결합해 방어했다. 12세기 이후 유럽 전역에 수백 개의 정착지가 새로 생겼고, 많은 곳이 곧 요새화 권리를 얻었다. 오스트리아의 성벽 도시, 탈린의 성벽, 잉글랜드 요크와 캔터베리의 읍성, 독일 뇌르들링겐·딩켈스뷜·베르힝·로텐부르크 옵 데어 타우버의 중세 성벽, 스페인의 아빌라·토사 델 마르 중세 성벽, 루고의 온전한 로마 성벽 등이 현존한다. 중세 전쟁에서 읍성은 방어 기능뿐 아니라 도시 정체성을 형성하는 표지로서도 표적이 되었으며, 고고학자 줄리아 벨라토(Giulia Bellato)는 "성벽은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가시적 표지이자 주민을 시민으로 규정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동방 식민 시기에는 중부·동유럽에서 영토 확장을 위해 계획적 배치와 넓은 광장을 가진 도시가 다수 건설되었고, 그 방어 시설은 당대 군사 기술 수준을 반영해 지속적으로 개량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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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화약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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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중국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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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화약과 대포가 중국에서 발명되었음에도 중국은 다른 지역만큼 성벽 파괴용 포병을 발달시키지 않았다. 중국 성벽이 이미 포격에 강해 대포 대형화를 억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세기 중반 유럽 요새술 전문가는 "중국 주요 도시는 오늘날까지도 중세 유럽 요새가 왜소해 보일 만큼 장대하고 높고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평했다. 중국 성벽은 두꺼웠다. 기원전 859년 축조된 고 임치(Linzi) 동쪽 성벽은 최대 두께 43m, 평균 20~30m에 달했다. 명나라 부·성급 수도 성벽은 밑동 두께 10~20m, 꼭대기 5~10m였다. 반면 로마 제국기 유럽 성벽 높이는 10m로 중국과 비슷했으나 두께는 1.5~2.5m에 불과했다. 로마 세르비우스 성벽은 두께 3.6~4m, 높이 6~10m였으며, 콘스탄티노플 이중 성벽을 합쳐도 중국 주요 성벽 밑동 너비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 필론(Philo)은 비화약 시대 공성 병기를 견디려면 4.5m 두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12~13세기 유럽 성벽은 로마 수준에 이르렀으나 길이·너비·높이에서 이를 넘지 못하고 2m 안팎 두께에 머물렀다. 중세 유럽에서 '매우 두꺼운 벽'이라 하면 2.5m 폭을 뜻했는데, 중국 기준으로는 얇은 축에 들었다. 예외적으로 켈트족 오첸하우젠(Otzenhausen) 산성은 부분적으로 40m 두께를 보였으나 켈트 축성술은 중세 초기에 맥이 끊겼다. 안드라데는 장안(Chang'an) 시장 성벽이 유럽 주요 수도 성벽보다 두꺼웠다고 기록했다.
추가:
추가: 구조적으로도 차이가 컸다. 유럽 성벽은 돌과 자갈·부석을 석회 모르타르로 결합한 반면, 중국 성벽은 다짐 흙 핵심을 두어 포탄 에너지를 흡수했다. 나무 틀에 흙을 층층이 채워 극도로 다진 뒤 틀을 떼어 다음 구간에 재사용하는 방식이었으며, 송나라부터는 벽돌·석재 외피를 입혀 침식을 막았고, 명나라에는 토석 혼합 공법이 쓰였다. 대다수 중국 성벽은 수직이 아닌 경사면을 이루어 포탄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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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유럽의 대포 대응책은 낮고 두꺼운 다짐 흙벽을 쌓아 포탄을 버티고 방어용 대포를 올리는 것이었다. 우연히도 중국 축성법은 처음부터 모든 타격에 강했고, 20세기 현대 고폭탄에도 다짐 흙벽은 돌파가 쉽지 않았다. '중국 성벽 이론'은 비용-편익 가설에 기대는데, 명나라가 자국 성벽의 높은 내구성을 인지하고 당시 보유 포병으로는 돌파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대포 대형화에 투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490년대 피렌체 외교관조차 프랑스가 "8피트 두께 성벽을 돌파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을 허풍으로 여겼다. 중국 전사에서 대포로 성벽을 직접 뚫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손자(孫子)와 정지룡(鄭芝龍) 같은 명장들은 성벽 정면 공격을 피하라고 권했다. 직접 공격 시에도 성벽보다 성문을 노리는 게 보통이었다. 정성공(鄭成功)이 소규모 마을 성벽을 포격해 함락시킨 타이저우(Taizhou) 공방전(1658년)이 유일한 기록으로 남는다. 1662년 네덜란드군이 푸젠성 한 도시 성벽을 포격했으나 효과가 없어 성문으로 선회했고, 1841년 영국 74문 군함이 광저우 인근 해안 포대를 수평 사격했으나 "거의 무력했다". 20세기 고폭탄조차 다짐 흙벽에 구멍 내기 어려웠다는 기록이 있다.
추가:
추가: 난징(Nanking) 공방전 당시 중화문(Chunghua Gate) 공격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난징으로 진격해 12월 적 수도 공격에 가담했다. 우리 부대가 중화문을 맡았다. 약 일주일 동안 포병으로 벽돌·흙벽을 때렸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12월 11일 밤 우리 부대원이 성벽을 돌파했다. 아침이 되자 대부분 부대는 아직 뒤에 있었으나 우리는 이미 성벽 너머에 있었다. 문 뒤에는 모래주머니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치우고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해냈다! 요새를 열었다! 적이 모두 도망쳐 총알 한 발 맞지 않았다. 주민도 없었다. 성벽을 넘자 우리가 이 도시를 점령했다고 생각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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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포대와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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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유럽에서는 15세기 중반 화약 포병에 대응해 낮고 두꺼운 벽체, 포문을 낸 포탑 등 새로운 축성 원리가 등장했다. 포탑 내부에는 대포를 놓아 벽면 틈새로 사격할 수 있게 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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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기능과 사용법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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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성벽은 정착지 외곽을 둘러싸 외부 침입을 차단하고 내부를 방어하는 물리적 장벽 구실을 한다. 지형에 따라 강·해안선 등을 자연 방어선으로 편입시켜 효과를 높인다. 출입은 성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성벽 위나 탑에 병력을 배치해 원거리 공격과 감시를 수행한다. 단순 토석 축성부터 정교한 석조·벽돌 구조까지 축조 기술은 시대·지역·가용 자원에 따라 다양하다. 방어 기능 외에도 성벽은 정치적 자치권과 도시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상징물로 기능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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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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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역사학자와 요새술 연구자들은 중국 성벽의 두께·구조가 화약 무기 발달 경로를 바꿨다는 점에 주목한다. 안드라데는 중국 성벽이 대포 대형화를 억제해 유럽과 다른 군사 기술 경로를 낳았다고 분석한다. 벨라토는 중세 유럽에서 성벽이 도시 정체성과 시민권의 가시적 표지였다고 평가한다. 20세기 실전 기록에서도 다짐 흙벽이 현대 포격에 강하다는 점이 확인된다. 반면 유럽은 화약 등장에 맞춰 성곽·포대 체계로 신속히 전환했다. 한국 읍성은 일제 강점기 철거령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복원·연구가 뒤늦게 진행 중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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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이 문서는 GGWiki AI가 공개 자료(아래 출처)를 조사해 새로 쓴 초안입니다. 틀린 내용은 편집하거나 이의 제기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