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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오브 레전드 / 스토리·세계관 / 얼룩진 이름

개요

『얼룩진 이름』은 2018년 4월 2일 공개된 리그 오브 레전드 유니버스 공식 단편 소설로, 존 오브라이언이 집필했으며 분량은 약 1005단어이다 [1]. 이 이야기는 녹서스 침략 이후 아이오니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해야만 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이렐리아의 내면적 갈등과 고뇌를 다룬다 [1].

이야기는 리그 오브 레전드이렐리아가 자신을 암살하려던 형제단 추종자 한 명을 정당방위로 처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 남자는 죽기 직전까지 이렐리아가 자신들을 이끌어주지 않음에 분노하며 형제단이 나서겠다고 외쳤으나, 이렐리아는 "난 믿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라며 칼날 춤으로 그의 생을 마감한다 [1]. 야영지 천막으로 돌아온 이렐리아는 아버지에게 가문의 명예를 피로 더럽혔다며 용서를 구하고, 칼날들을 닦으며 물이 붉게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1]. 칼날에 밴 오래된 얼룩은 고향 나보리 사람들의 피이자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이었다 [1]. 한때 카르마의 가르침대로 누구도 해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가문의 문장(잔, 나보리, 최초의 땅을 상징하는 세 개의 상징)이 이제는 셀 수 없는 목숨을 빼앗은 무기로 전락했음을 자각한다 [1].

매장지로 향하는 길에 이렐리아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지나치지만, 초창기 동지들은 이미 스러지고 낯선 얼굴들만 가득함을 실감한다 [1]. 매장지에서 유족을 위로하던 중 한 남자가 이렐리아의 손을 뿌리치며 냉대하자, 그녀는 "꼭 필요한 일이었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확신이 없다 [1]. 그때 나이 든 여인이 다가와 견과를 칼로 까는 모습을 보이며 "옛날에는 손으로도 깔 수 있었는데 지금은 칼이 있어야 한다. 그때의 나는 지금 여기 살지 않는다"고 말한다 [1]. 이 말에 이렐리아는 오랜만에 미소를 지으며, 칼날들이 다시는 깨끗해지거나 하나가 되지 않더라도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로 충분함을 깨닫는다 [1].

줄거리

스포일러 경고: 이 문단은 단편 소설 "얼룩진 이름"의 결말까지 모두 담고 있습니다.[1]

이렐리아와 형제단 추종자의 대결

이렐리아는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진흙탕 속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1] 남자는 형제단의 추종자로, 온몸이 이렐리아의 칼날 공격으로 상처 입은 상태였다.[1] 남자는 입술을 움직여 쥐어짜내듯 "난 너를 믿었단 말이다, 칼날 무희! 네가 우리에게 길을 보여줬는데… 우린 강해질 수 있었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단 말이다..."라고 말했다.[1] 남자는 이전부터 마을에 들어와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를 노리고 있었으나 서투르고 어설펐으며, 이렐리아는 너무나 손쉽게 그를 춤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1] 남자는 이렐리아를 죽이려 했으며, 그녀를 암살하려던 사람이 이 남자가 처음이 아니었다.[1] 이렐리아의 칼날들은 어깨 위 공중에 뜬 채 그녀의 양손 동작에 맞춰 우아하게 원을 그리고 있었고, 한 손을 가볍게 흔들기만 하면 마무리될 참이었다.[1] 남자는 땅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증오심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렐리아를 올려다보며 "네가 나보리를 이끌지 않겠다면, 우리 형제단이 나서겠어."라고 말했고, 간신히 단검을 들어올려 이렐리아를 겨누려 했으나 살아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1] 남자가 다시 "난 너를 믿었단 말이다. 우리 모두가 믿었어…"라고 말하자, 이렐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난 믿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유감이군."이라고 답했다.[1] 이렐리아의 팔과 다리가 물 흐르듯 나긋나긋 움직였고, 그녀가 몸을 한쪽으로 돌리자 칼날들이 치명적인 활 모양을 그리며 남자에게 날아갔다.[1] 이는 이렐리아로서는 정당방위이자 남자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푸는 동작이었다.[1] 살짝 몸을 돌리며 우아하게 한 발 내딛는 것만으로 칼날들은 이렐리아에게 돌아왔고, 날은 붉은빛으로 번들거렸다.[1] 생명이 빠져나간 남자의 몸뚱이가 앞으로 고꾸라졌고, 이렐리아는 "영혼이 그대를 평온으로 이끌기를."라고 중얼거렸다.[1]

야영지에서의 고뇌와 칼날 손질

야영지로 향하는 이렐리아의 발걸음은 무거웠다.[1] 자신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 드디어 혼자 있게 되자, 그녀는 긴장감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갈대로 만든 깔개 위에 몸을 웅크렸다.[1] 이렐리아는 눈을 감고 가만히 "아버지… 오늘 또다시 가문의 명예를 피로 더럽혔어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속삭였다.[1] 이렐리아는 칼날들을 눈앞 허공에 펼쳐보았다.[1] 한때는 훨씬 더 위대한 가치를 상징하는 단일체였으나 지금은 조각조각 갈라져 폭력이라는 목적에 동원되는 것이, 마치 아이오니아 그 자체와도 같았다.[1] 그녀는 작은 나무 그릇에 물을 붓고 헝겊을 적셔 칼날을 닦기 시작했는데, 이 단순한 일이 언제부터인가 전투를 끝낸 후에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식처럼 느껴졌다.[1] 칼날을 닦아가는 동안 그릇 속 물은 서서히 붉은빛으로 변했다.[1] 갓 묻은 피를 헝겊으로 닦아내도 칼날의 금속은 오히려 더 어두운 색을 띠었고, 오래된 얼룩은 아무리 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1] 그것은 이렐리아 고향 땅 사람들, 나보리의 피였다.[1] 이렐리아는 생각에 잠긴 채 칼날들을 천천히 움직여 원래의 단일체, 그녀 가문의 문장 모양이 되게 만들었다.[1] 잔이라는 이름과, 고향 나보리와, 최초의 땅 전체를 나타내는 세 개의 상징이 금이 간 채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1] 그 셋은 모두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고, 이렐리아의 선조들은 늘 카르마의 가르침을 따르며 어떤 환경에서도 아무도 해치지 않는 삶을 살았다.[1] 그런데 지금, 아이오니아의 인장과 문장은 셀 수도 없이 많은 목숨을 빼앗은 무기로 전락했다.[1] 이렐리아는 형제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만 같았다.[1] 지금쯤 아이오니아의 혼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그녀는 형제들이 자신을 보고 실망하고 분노할까봐 마음이 무거워졌다.[1] 이렐리아의 눈앞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1] 손녀가 누군가를 처치할 때마다 비통해 하며 흐느끼시는 모습이었다.[1] 이렐리아 역시 얼마 전까지는 할머니가 우시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1] 칼날들은 절대 깨끗해지지 않을 것이었고, 이렐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1]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해친 사람들에게 예는 다할 것이었다.[1]

매장지에서의 만남과 대화

처치한 남자를 자루에 담아 매장지로 가는 길에, 이렐리아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추종자들을 무수히 지나쳤다.[1]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렐리아가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1] 하지만 이렐리아가 아는 얼굴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1] 겨울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낯선 얼굴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1] 가장 먼저 저항 세력에 합류했던 얼굴들은 스러졌고, 새롭고 더 열의가 넘치는 투사들의 얼굴이 그 자리를 채웠다.[1] 그들은 각자 머나먼 지역에서, 이렐리아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마을에서 왔다.[1] 그래도 이렐리아는 몇 걸음마다 멈춰서서 그들이 건성으로 하는 경례와 절에 답례를 했고, 자루 끄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사양했다.[1] 매장지에 도착하자 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나무 아래 빈 땅이 보였다.[1] 이렐리아는 시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남편을 잃은 아내들과 아내를 잃은 남편들, 부모를 잃은 아들과 딸들의 슬픔에 합류했다.[1] 이렐리아는 흙이 채 마르지 않은 봉분 한 쌍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어느 남자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가만히 짚으며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어떤 삶이든, 어떤 죽음이든 모두 영혼—"이라고 말했으나, 남자는 이렐리아의 손을 홱 뿌리치고는 그녀를 똑바로 쏘아 보았다.[1] 그 서슬에 이렐리아는 뒤로 물러섰다.[1] 이렐리아는 혼자 "꼭 필요한 일이었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니까. 형제단이 그 무지막지한 수단으로 아이오니아를 휘어잡게 되면, 녹서스 점령 때나 다름 없는 세상이 될 거야…"라고 중얼거렸으나 그 말투에는 확신이 없었다.[1] 문득 이렐리아의 눈에 나이 든 여인 하나가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납작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1] 여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도가를 부르고 있었고,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1] 옷차림은 간소했고, 한 손은 바로 옆에 세워진 묘석에 얹었으며, 묘석 주변에는 죽은 이에게 바치는 음식이 놓여 있었다.[1] 여인이 노래를 멈추자 이렐리아는 흠칫 놀랐다.[1] 여인이 "여기 묻힐 사람을 데려온 건가요, 잔의 딸이여? 보다시피 여긴 이제 남은 땅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친구라면 곧 우리의 친구죠."라고 말을 걸었다.[1] 이렐리아는 "이 남자는 제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말씀 감사해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아도 될 사람이니까요."라고 답하며 망설이다가 한 발짝 다가서서 "아까 옛날 노래를 부르고 계셨죠?"라고 물었다.[1] 나이 든 여인은 "나쁜 일들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게 해주거든요. 내 조카예요."라고 봉분의 흙을 토닥거렸고, 이렐리아는 "아… 애도를 표합니다."라고 말했다.[1] 여인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걸 알아요. 게다가, 이 모든 것도 영혼의 길의 일부인 걸요. 안 그래요?"라고 다정하게 말했고, 여인의 다정한 태도에 이렐리아는 마음이 편안해졌다.[1] 이렐리아는 "가끔은 잘 모르겠어요."라고 불쑥 고백하듯 말했고, 나이 든 여인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상체를 일으켰다.[1] 이렐리아는 오래 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의심이 드디어 구체적인 낱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는 느낌으로 말을 이었다.[1] "가끔은… 가끔은 제가 우리의 평화를 해친 게 아닌가 싶거든요."라는 이렐리아의 말에 여인이 "우리의 평화를 해쳤다고요?"라고 되묻자, 이렐리아는 "녹서스가 침략했을 때 말이에요. 우리는 반격을 했지만, 그때 우린 뭔가를 잃어버렸는지도 몰라요.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라고 답했다.[1]

나이 든 여인의 지혜와 이렐리아의 깨달음

나이 든 여인은 의자에서 일어섰다.[1] 그녀는 커다란 견과를 하나 들고 그 껍질을 벌리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1] "나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기억한다우. 참 좋은 때였지! 나보다도 더 사무치게 평화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라고 여인은 주름지고 마디 굵은 손가락 하나를 뻗어 이렐리아의 팔을 살짝 눌렀다.[1] 여인은 허리띠에서 작은 칼을 뽑더니 견과의 껍질 틈에 쑤셔넣으며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지. 그때 되던 게 지금은 안 되는 게 많다우. 그런 걸로 고민할 것 없어요."라고 말했다.[1] 드디어 견과의 껍질 틈이 벌어졌고, 여인은 껍질 속 바스러진 알맹이를 꺼내 무덤에 놓은 그릇에 넣었다.[1] "봤죠? 옛날에는 이 정도 견과야 손으로도 깔 수 있었는데, 지금은 칼이 있어야 해요. 젊었을 때의 나라면 안달복달하다 못해 껍질을 아예 깨버렸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지 않으니까."라고 나이 든 여인은 다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까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1] 참으로 오랜만에, 이렐리아는 미소를 지었다.[1] 지금 등에 멘 가방에는 가문의 문장 조각, 그녀의 무기인 칼날들이 보호용 천에 싸여 들어 있었다.[1] 그 날들은 절대 깨끗해지지 않을 것임을, 다시는 하나가 되지 않을 것임을, 이렐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1] 하지만 칼날들은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1]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1]

등장인물

  • 리그 오브 레전드이렐리아: 나보리 출신의 칼날 무희이자 저항 세력의 지도자. 형제단 추종자를 정당방위로 처치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며 칼날을 닦고 시신을 매장한다. 선조들이 카르마의 가르침을 따랐음을 회상하고, 전쟁으로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지 의문을 품는다. 노파와의 대화를 통해 마음을 다잡고 무기로서의 칼날을 받아들인다. [1]
  • 형제단 추종자(남자): 이렐리아를 믿고 따랐으나 그녀가 지도자 역할을 거부하자 배신감을 느껴 암살을 시도하다 이렐리아의 칼날에 사망한다. 죽기 직전 "난 너를 믿었단 말이다"라고 반복하며 원망을 표한다. [1]
  • 노파(나이 든 여인): 매장지에서 애도가를 부르며 조카의 묘를 돌보는 노인. 이렐리아에게 견과 껍질을 칼로 까는 비유로 세상이 변했음을 일깨워주고, 과거의 평화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라며 위로한다. [1]
  • 이렐리아의 아버지(언급): 이렐리아가 칼날을 닦으며 "아버지… 오늘 또다시 가문의 명예를 피로 더럽혔어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사죄하는 대상. [1]
  • 이렐리아의 형제들(언급): 아이오니아의 혼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으나, 이렐리아는 그들이 자신을 실망하고 분노할까 봐 두려워한다. [1]
  • 이렐리아의 할머니(언급): 손녀가 누군가를 처치할 때마다 비통해하며 흐느끼셨던 분. 이렐리아 역시 얼마 전까지 할머니의 우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1]
  • 저항 세력 추종자들(언급): 이렐리아를 믿고 따르며 그녀가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이들. 겨울이 지날 때마다 낯선 얼굴들이 늘어나고, 초창기 멤버들은 이미 스러졌다. [1]
  • 매장지 유족들(언급): 남편을 잃은 아내들, 아내를 잃은 남편들, 부모를 잃은 아들딸들로 구성된 슬픔에 잠긴 이들. 이렐리아가 위로를 건네려 했으나 한 남자가 손을 뿌리치며 적개심을 드러낸다. [1]
  • 노파의 조카(언급): 노파가 매장지에서 애도하는 대상. 묘석 주변에 음식이 놓여 있다. [1]
  • 카르마(언급): 이렐리아의 선조들이 따르던 가르침의 주체. "어떤 환경에서도 아무도 해치지 않는 삶"을 설파했다. [1]

배경·설정

이렐리아의 내면 갈등과 가문의 유산

이렐리아는 형제단의 추종자였던 남자를 정당방위로 처치한 뒤 야영지의 천막으로 돌아와 갈대 깔개 위에 웅크리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했다.[1] 그녀는 눈앞에 떠 있는 칼날들이 한때 훨씬 더 위대한 가치를 상징하는 단일체였으나 지금은 조각조각 갈라져 폭력이라는 목적에 동원되고 있다고 느꼈으며, 이것이 마치 아이오니아 그 자체와도 같다고 생각했다.[1] 작은 나무 그릇에 물을 붓고 헝겊으로 칼날을 닦는 일이 전투 후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식처럼 느껴졌고, 그릇 속 물은 서서히 붉은빛으로 변했다.[1] 갓 묻은 피를 닦아내도 칼날의 금속은 오히려 더 어두운 색을 띠었고, 오래된 얼룩은 아무리 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렐리아 고향 땅 사람들인 나보리의 피였다.[1]

이렐리아는 칼날들을 천천히 움직여 원래의 단일체, 그녀 가문의 문장 모양으로 만들었다.[1] 문양은 잔이라는 이름과, 고향 나보리와, 최초의 땅 전체를 나타내는 세 개의 상징이 금이 간 채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셋은 모두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1] 이렐리아의 선조들은 늘 카르마의 가르침을 따르며 어떤 환경에서도 아무도 해치지 않는 삶을 살았으나, 지금 아이오니아의 인장과 문장은 셀 수도 없이 많은 목숨을 빼앗은 무기로 전락했다.[1]

추종자들의 변화와 매장 의식

이렐리아는 형제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녀가 누군가를 처치할 때마다 비통해하며 흐느끼시던 모습도 떠올랐다.[1] 처치한 남자를 자루에 담아 매장지로 가는 길에 자신을 믿고 따르는 추종자들을 무수히 지나쳤는데,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렐리아가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1] 이렐리아가 아는 얼굴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겨울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낯선 얼굴들이 점점 더 늘어났으며, 가장 먼저 저항 세력에 합류했던 얼굴들은 스러졌고 새롭고 더 열의가 넘치는 투사들의 얼굴이 그 자리를 채웠다.[1] 그들은 각자 머나먼 지역에서, 이렐리아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마을에서 왔다.[1] 이렐리아는 몇 걸음마다 멈춰서서 그들이 건성으로 하는 경례와 절에 답례를 했고, 자루 끄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사양했다.[1]

매장지에 도착하자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 빈 땅이 보였다.[1] 이렐리아는 시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남편을 잃은 아내들과 아내를 잃은 남편들, 부모를 잃은 아들과 딸들의 슬픔에 합류했다.[1] 그녀는 흙이 채 마르지 않은 봉분 한 쌍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가만히 짚으며 "어떤 삶이든, 어떤 죽음이든 모두 영혼—"이라고 위로하려 했으나, 남자는 이렐리아의 손을 홱 뿌리치며 쏘아보았다.[1] 이렐리아는 혼자 "꼭 필요한 일이었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니까. 형제단이 그 무지막지한 수단으로 아이오니아를 휘어잡게 되면, 녹서스 점령 때나 다름 없는 세상이 될 거야…"라고 중얼거렸으나 말투에는 확신이 없었다.[1]

나이 든 여인과의 대화

문득 이렐리아의 눈에 나이 든 여인 하나가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납작한 의자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도가를 부르며 묘석에 음식을 바치는 모습이 들어왔다.[1] 여인이 노래를 멈추고 "여기 묻힐 사람을 데려온 건가요, 잔의 딸이여? 보다시피 여긴 이제 남은 땅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친구라면 곧 우리의 친구죠."라고 말을 걸었다.[1] 이렐리아는 "이 남자는 제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말씀 감사해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아도 될 사람이니까요."라고 답하고 옛날 노래를 부르고 계셨냐고 물었다.[1] 여인은 "나쁜 일들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게 해주거든요. 내 조카예요."라고 대답했다.[1] 이렐리아가 애도를 표하자 여인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걸 알아요. 게다가, 이 모든 것도 영혼의 길의 일부인 걸요. 안 그래요?"라고 다정하게 말했다.[1]

여인의 태도에 마음이 편안해진 이렐리아는 "가끔은 잘 모르겠어요."라고 고백하듯 말했고, 여인이 더 말해 보라는 듯 상체를 일으키자 오래 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의심을 구체적인 낱말로 털어놓았다.[1] "가끔은… 가끔은 제가 우리의 평화를 해친 게 아닌가 싶거든요. 녹서스가 침략했을 때 말이에요. 우리는 반격을 했지만, 그때 우린 뭔가를 잃어버렸는지도 몰라요.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1]

나이 든 여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커다란 견과 껍질을 벌리려다 실패하고 "나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기억한다우. 참 좋은 때였지! 나보다도 더 사무치게 평화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허리띠에서 작은 칼을 뽑아 견과 껍질 틈에 쑤셔넣었다.[1] 드디어 껍질 틈이 벌어지자 여인은 바스러진 알맹이를 꺼내 무덤에 놓은 그릇에 넣으며 "봤죠? 옛날에는 이 정도 견과야 손으로도 깔 수 있었는데, 지금은 칼이 있어야 해요. 젊었을 때의 나라면 안달복달하다 못해 껍질을 아예 깨버렸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지 않으니까."라고 말하고 아까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1]

참으로 오랜만에 이렐리아는 미소를 지었다.[1] 지금 등에 멘 가방에는 가문의 문장 조각, 그녀의 무기인 칼날들이 보호용 천에 싸여 들어 있었다.[1] 그 날들은 절대 깨끗해지지 않을 것임을, 다시는 하나가 되지 않을 것임을 이렐리아는 잘 알고 있었지만, 칼날들은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1]

기타

  • 공개일: 2018년 4월 2일[1]
  • 분량: 약 1005단어[1]
  • 작가: 존 오브라이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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